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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것이로다

하나님에게 열중하고, 그의 선하심에 압도되는 의식 속에 빠져 들며,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고, 언제나 사랑의 불꽃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무한의 기쁨의 상태인가! 순수한 기쁨과 본질적인 즐거움이 무엇인지 영혼이 알 때는 바로 영혼이 스스로 지쳐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 존재의 창조주께 자신을 내주며, 자신이 신성하고 헌신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느끼고, 또한 내적인 의식과 느낌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것이로다. 나는 그의 모든 관심을 위해 내 자신의 관심을 어기며, 또한 나는 그의 것이라네.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만족한다네. 그리고 그를 섬기는 것 외에는 내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네.” 이런 성격이 형성된 사람은 모든 섭리의 뜻 가운데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모든 섭리 가운데서 거룩한 선을 맛보고, 그 섭리를 그의 가장 사랑하는 주인이자 선생님이신 주님께서 보내신 사랑의 증표로 생각할 때 일시적인 기쁨은 또 다른 맛을 갖게 될 것이다. 징계가 기쁘지 않고 슬프지만, 이로 인하여 찔리는 아픔을 잊어버릴 것이다. 지팡이뿐만 아니라 막대기도 그를 안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치는 손으로부터 뜻밖에 입맞춤을 얻을 것이며, 그 혹독함으로부터 달콤함을 수확할 것이다. 아니,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그런 가치 없고 어리석은 피조물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무한히 거룩하고 지혜로운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계획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헨리 스쿠걸-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중에서"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출판사)

by 고수주 | 2006/04/23 13:40 | 묵상 | 트랙백

마음의 문을 여세요

심연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감옥

불행한 이여 !

나에게 당신은 이방인이야

당신은 시궁창에서 나고 자랐지

당신은 갇혀 있어 당신에겐 어떤 생명도 없으니까

당신 앞에 기대할 만한 기쁨도

당신을 사랑해줄 아이들도 존중해 줄 어느 누구도 없어

 

내 깨끗한 옷차림

내 민감한 코(고약한 냄새는 딱 질색이야!)

나의 예의바름

따뜻한 집, 안위의 세계

현실의 빛은 내 독방(獨房)에 스며들지 않아

다른 인간들이 실재로 겪고 있는 불행이

아무리 멀리, 아무리 깊이 퍼져 있다 해도


심연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감옥

불행한 자는 고통에 빠져 있고

그 옆 독방(獨房)에는 안락한 부자가 있습니다.

세상은 제 갈 길로 가고 있습니다.

두 개의 감옥은 점점 더 두터워져 가는 데

그 누가 다리를 놓을까요?


와서 듣고 배우세요

다른 이들과 그들의 행위를 판단하지 말고

다만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여세요

그대가 이렇게 와서

마음의 문을 열고

겸손히 들으며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면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를 믿는다는 것을

그대의 가슴은 벅차게 흔들리고

나눔의 비밀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려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 세대를 위한 놀라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부와 권세와 야망을 구하지 말고 화평을 구하라. 네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머물라. 그러면 내가 네게 화평을 주리라 네가 화평 가운데 성장하며 소박하고 가난한 생활과 복음적인 삶 속에서 성장하면, 나는 네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줄 것이며 너는 온유의 무기를 들고 의를 얻을 것이다. 나는 네게 새 힘,성령의 능력을 너희에게 주겠다. 그 능력은 무엇보다도 긍휼로 나타날 것이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너는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 노인들, 장애가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라.


중요한 것은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긍휼을 요약한 것이다. 긍휼은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줌으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네가 귀 기울일 때 그들은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네가 귀 기울일 때 그들은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네가 귀 기울일 때 너는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들이 자유에 도달하길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너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 평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장 바니에- "희망의 문"중에서 (홍성사)

by 고수주 | 2006/04/22 13:26 | 묵상 | 트랙백

기쁨과 고통은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우리는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기회를 많이 주십니다. 우리 내면의 진리에 대해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기회,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영적인 삶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변화시킵니다.

 

태어나고 자라는 것,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 칭찬 받거나 거절 당하는 것, 걷는 것과 쉬는 것, 기도하는 것과 노는 것, 아픈 것과 치료받는 것 그리고 사는 것과 죽는 것, 이 모든 것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 여정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네 그렇습니다”라고 할 수도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시각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면,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구분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쁨과 고통이 둘 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인정하는 기회가 된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슷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는 내 사랑한 자요"( 한국 ivp)

by 고수주 | 2006/04/21 14:46 | 묵상 | 트랙백

죽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9장27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

 

인간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죽음과 동등한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며, 생명이 매듭이 풀리거나 산산이 찢겨져 버린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또 모든 관계가 죽음으로 일시에 단절되며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시련기간과 준비 상태가 끝나고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치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잘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잘 죽을 것이요, 또 한번만 죽으면 된다는 것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죽어야 하는 악인들에게는 그들이 다시는 잘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이 큰 공포가 될 것입니다.죽은 뒤에 심판석으로 나아가 즉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심판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혼의 영원한 삶의 자리를 심판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세상의 종말이 오면 심판자에게 불려갈 것입니다. 인간이 죽어야만 하며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불변의 섭리이다. 이상과 같은 것이 인간들에게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므로 인간들은 이 사실을 믿어야 하며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히브리서주석"중에서(기독교문사)

by 고수주 | 2006/04/19 15:01 | 기독교고전연구 | 트랙백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오직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베드로전서 1장24-25절 )

 

by 고수주 | 2006/04/17 12:18 | 트랙백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것이로다

하나님에게 열중하고, 그의 선하심에 압도되는 의식 속에 빠져 들며,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고, 언제나 사랑의 불꽃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무한의 기쁨의 상태인가! 순수한 기쁨과 본질적인 즐거움이 무엇인지 영혼이 알 때는 바로 영혼이 스스로 지쳐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 존재의 창조주께 자신을 내주며, 자신이 신성하고 헌신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느끼고, 또한 내적인 의식과 느낌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것이로다. 나는 그의 모든 관심을 위해 내 자신의 관심을 어기며, 또한 나는 그의 것이라네.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만족한다네. 그리고 그를 섬기는 것 외에는 내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네.” 이런 성격이 형성된 사람은 모든 섭리의 뜻 가운데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모든 섭리 가운데서 거룩한 선을 맛보고, 그 섭리를 그의 가장 사랑하는 주인이자 선생님이신 주님께서 보내신 사랑의 증표로 생각할 때 일시적인 기쁨은 또 다른 맛을 갖게 될 것이다. 징계가 기쁘지 않고 슬프지만, 이로 인하여 찔리는 아픔을 잊어버릴 것이다. 지팡이뿐만 아니라 막대기도 그를 안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치는 손으로부터 뜻밖에 입맞춤을 얻을 것이며, 그 혹독함으로부터 달콤함을 수확할 것이다. 아니,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그런 가치 없고 어리석은 피조물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무한히 거룩하고 지혜로운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계획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헨리 스쿠걸-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중에서"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출판사)

by 고수주 | 2006/04/16 13:32 | 묵상 | 트랙백

믿음의 본질은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 곧 택자의 믿음은(the faith of the elect)
우리의 본성적인 부패를 뛰어넘고, 우리의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은 순수한 본성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초자연적인’선물입니다. 이 믿음은 타락이후에 중생(거듭남)에 덧붙여진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이며, 은혜언약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한 가지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같은 다른 하나님의 선물들과 구별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물들은 타락이전에도 사람의 본성 안에 있었으며,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갱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하는 믿음은 (justifying faith)은 갱신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 이후에 죄인들의 회심을 통해서 마음에 비로서 심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의지가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일종의 특별한 지식이거나 설득이기 때문이며,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는 설득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우리는 마음으로 믿는다고 말한다.(로마서 10장9절)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특정한 부분이라고 제한하지 않고 영혼으로 이해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갈라디아서3장14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붙잡는다는 것은 사람이 손을 내밀어 어떤 것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영혼의 손인 믿음과 비슷합니다.


믿음으로 붙잡는다는 것은 의지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확실하고 특별한 설득에 의해서 행해진다. 우리는 이 설득에 의해서 결심을 하게 되고 구원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설득은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일어나게 된다.(고전2:12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윌리엄 퍼킨스- "사도신경강해 32-34쪽 요약정리"

by 고수주 | 2006/04/15 11:42 | 기독교고전연구 | 트랙백

인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당신의 삶이 끝날 때 당신이 해야할 일도 끝나게 된다. 끝까지 인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가
 
시 방석에라도 앉은 듯 당신의 몸을 찌르기도 할 것이기에 견디다 못한 당신은 차라리 빨리 이 세상을 떠났으
 
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어려움들을 더욱 심화시
 
킬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기꺼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길 자처했고 한두 번 전투도 치러냈으나 결국은 자신의 의무를 내던져 버렸다. 즉 충동적인 감정으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었던 그들은 쉽게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초 저녁애 잠깐 떳다가는 이내 사라지고 마는 초생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인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매일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항상 기도하며, 주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결코 벗어 버리지 않을 때에만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인지 알아야 하며, 그러한 용기를 어떻게 소지할 수 있는가도 우리에게 당면한 실제적인 문제이다.

 

-윌리엄 거어널-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중에서 (예찬사)



by 고수주 | 2006/04/14 13:58 | 기독교고전연구 | 트랙백

종교는 신앙의 옷이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신앙은 피조성과 죄성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부딪쳐 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이다. 종교는 신앙의 옷이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순화되

고 개혁되지 않는 한 신앙을 억누르고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는 옷이다.

 

-도널드 블러쉬-"말씀과 성령의 신학" 중에서

by 고수주 | 2006/04/11 10:50 | 묵상 | 트랙백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사단은 거짓된 회개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서 이 사람에게는 이것으로 저 사람에게는 저것으로 속입니다. 또한 거짓말 하는 기술과 책략이 무한히 깊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선택된 신자라도 속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았으면서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위험한 오해를 바로 잡아 주기를 원하며, 회개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갈등과 두려움을 제거해 주려고 합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참된 회개라면(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회개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 죄에서 떠나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 행위로는 그 분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삶들을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실까요? 여전히 죄 안에서 살면서 회개했다고요? 그것은 명백한 모순입니다.  만일 신앙 고백이라는 등(燈)이 회개의 표시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마25:12)  우리는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도 악한 자들로 판단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되는 것을 봅니다.(마7:22-23)

 

-조셉 얼라인(1634-1668)- 회개의 참된 의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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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신앙에 대해 달콤한 말을 해주는 이보다 신앙에 대해 뼈아픈 충고를 해주는 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쓴 약이 자기의 병을 고치듯 쓴 말씀이 자기의 악과 죄를 버리고 회개에 이르도록, 구원하는 믿음에 이르도록 해 줄것입니다.  -고수주-

by 고수주 | 2006/04/10 21:25 | 기독교고전연구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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